적당하게 깔끔하고 부드러운 락씨의 요리들과 냅킨에서 풍기는 은은한 장미향에 완전히 몸을 맡기며 느슨해진 시선으로 잠시 멍해 있을 때쯤, 갑자기 락씨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자! 기운 좀 차려봐. 디저트! 나의 아름다운 돌체가 남았어!”
알수없이 신이 난 락씨의 표정.
“매큐! 너는 이 접시들 좀 포개어서 부엌으로 가져오고, 페를! 넌 음악을 바꾸는게 좋을 것 같은데.”
오케스트라의 수장과도 같은 그의 힘찬 음성에 잠깐 나른해졌던 매큐와 나는 백만 볼트 전류에 반응하듯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주섬 주섬 접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디저트가 아니라, 에스프레소 한 모금도 마시기 힘겨운 상태였지만 모처럼 우리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한 그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이때, 부엌에서 돌아온 매큐가 내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소곤거렸다.
“제가 이따가 소화제 준비할께요. 형님.”
나긋한 말씨로 무슨 재미난 비밀 얘기를 하듯 말이다. 은근한 말투도 그랬지만, 갑자기 형님이라는 호칭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듣기 거북하지는 않았지만, 사장에서 형으로 다시 형님으로 순식간에 바뀐 이 상황이 신기하는 했다. 나는 소화제까지는 필요없을 것 같으며, 사실 또 락씨의 디저트가 과연 어떨지 기대가 크다며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에어컨때문에 카페가 시원하긴 했지만, 공기만큼은 조금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테이블이 조금 정리되자 나는 의자를 밟고 서서 창가의 위쪽 창문을 열었다. 잠깐만이라도 그렇게 열어 두면 한결 나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락씨가 에어컨을 틀고서 왜 창문을 열었냐며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이라며 핀잔을 할 게 뻔했지만 말이다. 음악은 조금 빠른 템포의 재즈로 바꾸었다. 유펍피안 재즈 트리오의 <Libertango>를 골랐다. 한낮에 듣는 재즈는 수북이 쌓여있는 책들을 아주 가까이 마주한 느낌과 비슷하다. 종이냄새와 그 종이에 남겨진 사람들의 채취가 한데 어울려 풍기는 책들의 향기는 독특하게 사람을 유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있으면 늘 흐트러진 기분이 정리되는 느낌이랄까. 글자 하나 하나를 지긋이 응시하며 앞으로의 내용은 어떠할까 가늠해보는 것 또한 그렇다. 지금, 이 음악을 듣고 있는 동안에도 그렇다는 얘기다.
“전 크로스오버는 별루에요.” 매큐가 의자에 앉아 편하게 두 손을 등뒤로 둘러 열중쉬어의 자세를 취하며 내게 말했다.
“왜? 난 어느 음악이든 요새는 이런 느낌이 좋던데. 늘 열려있는 기분이랄까.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부분 부분들이 모여서 엄청나게 재미난 것이 만들어지는 느낌이거든. 좀 거창한가?”
내가 말했다.
“글쎄요. 전 그냥 오리저널이 좋아요. 재즈도 찬송가도요. 옛날식이 더 끌린다고 할까요. 갑자기 찬송가를 재즈식으로 연주한다고 해봐요. 그건 좀 이상하잖아요.”
“그거 괜찮은데. 이미 외국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있지 않나? 가스펠도 점차 대중가요만큼 감각적이 되가고 있고 말이야. 암튼 난 이런 시도들이 늘 맘에 들어.”
매큐는 아까의 자세를 유지하며 그저 창밖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오늘에서야 느끼지만 매큐는 정말 우직한 아이같다. 생김새는 유려한데, 안과 밖은 단단한 도자기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저 녀석은 정말 요새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부엌에 들어간 후 한참이나 소식이 없는 락씨를 기다리다 나는 급기야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봐요 쉐프! 1분 안에 디저트 준비 안되면 그냥 여기 매큐가 간다는데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나는 부엌 문 앞까지 걸어가 슬쩍 안을 쳐다보았다. 여기 문은 유리로 된 자동문이다. 락씨는 자동문의 버튼에 큼지막한 하트 스티커를 어느샌가 붙여 놓았다. 별스럽긴. 버튼을 누르고 내가 다시 소리친다.
“혹시 뭐 바닥에 떨어뜨린거 아니에요? 대체 뭐하세요?”
드디어 트레이를 조심스럽게 든 락씨가 나를 살짝 노려보며 냉장고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락씨를 위해 자동문 버튼을 가볍게 눌러주었다.
“너 때문이라도 내가 알코올을 좀 적셔줘야지 안되겠어.”
락씨는 알게 모르게 또 내 그림자를 살피며 걸어 나와, 데이블 위에 트레이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고 정말 환상적인 디저트의 향연으로 나와 매큐를 또 다시 혼절하게끔 만들었다.
첫 번째 디저트의 주제는 나비. 주름모양처럼 접혀 있는 크레페가 나비의 날개처럼 양쪽에 펼쳐져 있고, 가운데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커다란 구슬모양으로 하나 우아하게 얹어져 있었다. 그리고 초콜릿 소스가 더듬이 모양처럼 화려하게 날아서 접시위에 녹아 있었다. 두 번째는 티라미수. 칵테일 잔에 담겨진 티라미수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칵테일이 아니라 마가리타 잔이었는데, 잔의 끝에 입혀진 빨간색 테두리 장식과 그린 티라미수의 멋진 조우는 기가 막히기 자연스러웠다. 신난 매큐가 휘파람을 불었고, 나 역시 막 그럴 참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락씨는 한 술 더 떠서, 먹는 내내 티라미수가 자신을 한 5센티쯤은 끌어올리는 것 같다고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마지막으로는 레드 와인에 졸인 배위에 머랭을 얹어 살짝 구운 디저트였다. 이름도 어려운 자바이오네 소스를 곁들인 것이었는데, 달콤하면서도 은근한 그 맛이 시큼하면서 달콤한 배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원래 화이트 와인으로 졸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지만, 붉은 와인색의 배는 정말 매혹적으로 멋졌다. 우리는 벅찬 마음으로 이 디저트들을 정겹게 나누어 먹었다.
각각의 디저트들은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근사했기에 새삼스럽게도 락씨가 무슨 다른 세계의 마법사처럼 위대하게 보였다. 특히 매큐는 무척이나 감격스러워 보였는데, 갑자기 락씨를 끌어안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배불러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겠다는 푸념이 부끄러워서 도망갈 지경이었다. 락씨는 가느다란 눈동자로 웃으며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는데, 무언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락씨에게 그것은 아름다운 요리일 것이고, 나에게는 아마 이 자그마한 공간의 카페일 것이다. 매큐는… 그럼, 뭐가 있을까. 티라미수를 애지중지 하며 먹고 있던 매큐가 혼자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근데요, 혹시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세요? 그러니까, 케이크나 빵 같은 것을 만들 때 보면 밀가루 박력분을 쓰라고 되어 있잖아요. 전 그게 굉장히 재미있던데... 박력분이요. 밀가루가 막 박력있게 서로 엉키어 반죽되는 모습이 상상되어서요. 계란하고 버터 등이 들어가고 뭐 그런식이잖아요. 참 웃기면서도 감탄스러워요, 그 모습이. 그 씩씩하면서 툴툴거리는 밀가루의 모습이요. 저만 그런가요?”
매큐의 갑작스런 고백(?)에 당황한 락씨가 힘겹게 자신의 포크를 노려보더니, 웃음을 참으려는 듯 애매한 인상을 쓰기 시작했고, 나 역시 진지한 매큐의 표정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린 서로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매큐는 무안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