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난한 이웃의 시로코
-My mild neighbor, Sirocco
written by Beyondcafe
갓 구워낸 슬픔
저녁에 올 손님은 특이하게도 일주일 전에 예약을 취소했다가 다시 오늘로 예약한 사람이었다. 그런 고객은 드문데, 아니 지금까지는 없었던 터라 자못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닉네임은 장 킴. 어쩐지 그가 들어오면 반갑게 통성명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락씨는 두 시간 만에 다시 카페로 돌아왔는데 오전에 비해 핼쑥해진 모습이었다. 두어 번 어깨를 두드리며 힘을 북돋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 뭐하는 행동이냐는 도발적인 눈빛을 보낼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나는 아직도 락씨에게 뭔가 진지하게 사장으로서 힘을 낼만한 타이밍을 못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매큐는 잘 갔어?”
“네. 즐거운 녀석의 집으로 돌아갔지요.” 나는 왠지 딱딱한 말투로 답했다.
“왜 그래?”
“뭐가요?”
“페를! 넌 좀 그러지 마라. 내가 너까지 월차를 줘야겠어?”
내가 한숨을 쉬며 락씨를 쳐다보았다. 요리사가 사장에게 월차를 주는 그런 일은 내가 일어나지 않게 하리라.
“이건 또 무슨 음악이야?” 락씨가 내 눈을 피하며 말한다. 사실, 까칠함에는 그 보다 더한 까칠함이 처방이라고 했던가.
“손님이 부탁했어요. 처음 들어본 클래식인데, 중독성이 있어요. 그냥 틀었는데 계속 듣게 되네요.” 가만히 음악을 듣던 락씨가 혀끝에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얹고서 이게 무슨 맛인가 고민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거… 분명 엘비라 마디간인데.”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입니다.” 내가 즉시 정정하듯 힘주어 말했다.
락씨가 안쓰럽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손을 휘휘 저으며 부엌으로 그냥 향한다. 그리고는,
‘요리 준비할께. 손님 오시면 알려줘.’ 라며 말했다.
장 킴은 이 음악만 듣고 싶다고 했다. 두 시간 내내 오직 이 음악뿐이라니. 주문한 식사는 스테이크. 사실, 지금 듣는 음악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슬픈 그런 느낌의 덩어리다. ‘어쩔 수 없다’가 주는 어감의 수동적인 감흥이 그야말로 이 곡조에 그대로 가득하다는 얘기다. 모짜르트에 대해서 특별한 애착도 지식도 없는 나로서는 뭐라 평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스테이크라니! 손에 힘이 풀려 나이프가 접시위에서 스르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윽!
7시가 되자, 장은 문 앞에서 시간을 재고 있던 사람처럼 정확하게 카페로 들어왔다. 차 열쇠를 쥐고 공손하게 내게 인사를 한 뒤, 주저 없이 성큼 걸어 들어 왔다. 그는 책장을 마주볼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의 소파에 앉았는데, 그저 기본적인 검정 양복바지에 흰 와이셔츠 차림이었지만 세련미가 느껴졌다. 어느 친구의 말처럼, 옷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말이다. 손목시계도, 반지도 눈에 띄지 않지만 그에게서는 남자이면서도 아버지다운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풍긴다. 가정적이면서도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뜻일까. 잘 모르겠다. 그의 모습은 아직 개봉되지 않은 선물 꾸러미처럼 나에게 몇 가지 단서만을 흘릴 뿐이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락씨에게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는 미리 달궈둔 그릴위에 고기를 조심스럽게 얹고서는 ‘미디엄 웰던’ 이라고 혼자 짧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입고 있는 흰 상의의 요리사용 재킷이 오늘따라 돋보인다. 어쩌면 보호색처럼 말이다. 잠시 후, 장에게 다가가 ‘지금 먼저 커피를 드릴까요?’ 라고 말하자, 깊이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던 그가 화들짝 놀란다. 헛기침을 하며 ‘네, 지금 주세요.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이 ‘감사하다’ 는 말은 왠지 더 건조하면서 멀다. 마치 아주 외딴 곳에서 들리는 메아리와 같이.
오랜만에 나는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렸다. 원두는 중간 정도의 굵기로 맞춘 후 분쇄기에 넣고 갈았다. 그렇게 다소 성기게 갈려진 원두 가루를 종이필터에 주의 깊게 담고 드립포트에 담긴 뜨거운 물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부었다. 드립퍼는 칼리타. 투명하면서도 검붉은 커피가 실크 빛처럼 유연하게 컵에 조금씩 차오르고, 옅은 황갈색의 거품은 내 눈앞에서 일렁인다. 커피 모카, 노 휩. 간결한 장 킴의 주문처럼 그렇게 깔끔한 모카가 만들어질 것 같다. 초콜릿 소스를 커피에 넣어 녹이고 우유를 스티밍하여 그 위에 천천히 부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여기에 생크림까지 더해지면 정말 무자비하게 달콤한 커피가 완성되는 걸까. 그런데 원래 모카는 그런 맛을 원해서 마시는 것은 아닐지.
커피를 장에게 선사하고 부엌으로 갔더니 농익은 스테이크의 빛깔이 아스파라거스의 관대한 지지에 힘을 얻어 짙게 물들고 있었다. 나는 락씨에게 윙크를 하고서는 나이프, 포크 그리고 냅킨을 챙겨 접시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테이블에 스테이크 접시를 놓는 중에도 장은 여전히 어떤 무형의 상념에 빠진 외딴 섬과 같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음악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쉽게 배경이 되어 버린다. 지금 이곳의 배경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이곳은 흡사 한 장의 사진처럼 바래질지도…. 빈틈없이 빼곡한 배경 사이사이에 장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낙담한다. 몸서리치게 완강한 몸짓으로 지우고…지우고.. 무던히도 그렇게 말이다.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지친다. 결국 나는 급히 부엌으로 몸을 숨긴다. 락씨는 싱크대의 집기들을 마른 행주로 꼼꼼하게 닦고 있다.
“피곤하시죠?”
그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울 지경.
“뭐, 괜찮아. 하긴 오늘 좀 몸과 마음이 바쁘긴 했지.” 행주질을 멈추지 않고 그가 말한다.
“근데 말이야. 저 남자는 정체가 뭐야? 응? 페를, 네가 좀 설명해봐.”
“글쎄요. 계속 추억들과 씨름하고 있어요. 잘 보이진 않지만, 그냥 겉으로는 저렇게 조용하게 앉아 있어도 머릿속은 꽤나 복잡해요. 과부하가 걸린 엔진처럼 곧 터질 것 같으면서도 메마른… 뭐 그런 느낌이에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혼자서 레테의 강을 건너고 있군. 그럼.” 락씨가 중얼거리듯 말한다.
“네?”
“아주 오래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지. 스웨덴 영화 중에 ‘엘비라 마디간’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그 주인공 여자의 이름도 엘비라 마디간인데, 대충 줄거리는 귀족인 젊은 장교가 서커스를 하는 줄타기 소녀와 사랑에 빠져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다는 얘기지. 그 장교는 부인과 아이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도피하지만 경제적으로 힘들게 되자, 결국 비극적인 결정을 하게 돼. 어느 풀밭에서 엘비라 마디간은 한 마리 나비를 쫓아가며 즐거워하고, 이를 멀리서 지켜보는 남자의 시선이 애처롭게 흐르지. 그리고 영화는 두 발의 총성이 울리는 것으로 끝나. 이 영화의 주제가가 지금 저 남자가 계속 미친 듯이 듣고 있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이야. 그래서 이 곡이 엘비라 마디간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두 발의 총을 대신해서 이곳에 과거를 묻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네가 보기에는 어때?”
“그렇군요.”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의 윤곽이 뚜렷해진 것처럼 선명해짐을 느꼈다.
락씨는 마저 조리도구들을 닦으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가서 위로 좀 하겠어?”
“아니요. 뭐 하게요. 그렇다고 저런 식으로…유치해. 뭐, 이미 답을 구한 것 같은데요. 그 과정만 남았을 뿐이지.”
“어째 좀 툴툴거린다.” 락씨는 내 눈치를 살피는 듯 말한다.
“그냥, 뭐…. 어쨌든 불륜이잖아요. 저는 당사자만 행복하면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된다는 그런 논리는 이해 못하겠어요. 그것이 지금의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임과 배려 없이 그저... ‘우리 사랑하게 내버려 두세요’ 라는 외침은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열띠게 목소리를 높인 나는 갑자기 머쓱해버렸다.
“뭐야, 너?”
“뭘…요.”
“음…가족사의 숨겨진 이야기라도 있는 것이야? 아님, 그래서 네가 연인을 뺏겼다는 거야?” 호기심의 안테나를 천장까지 높이 올린 락씨가 서서히 다가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한다.
“아니에요. 그런 건. 그럼, 락씨는 그래도 된다는 거예요?”
“흐음… 글쎄. 뭐 그런 것보다는 사랑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가 더 큰 문제인 것 같아. 남자와 여자. 사람과 사람이 서로 감정을 교감하는 문제는, 단순하게 출발을 하더라도 그 끝은 그렇지 않잖아. 그게 과연 그들이 중요시하는 가족, 사회적 통념, 윤리, 뭐 이런 것들을 다 망라해서 포용될 수 있는 것인지… 난 항상 의문이었어. 그런데 과연 네 말대로 책임과 배려를 한다고 해. 그럼 그런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게 되는 걸까? 정말로? 사실… 그거 별 거 없다. 사랑을 두 글자로 묶어 놓은 것만큼 어리석은 해석이고 사설이야. 단지 그게 저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이야기’만 존재 할 뿐이야.”
“...... .”
나는 그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봤지만, 역시 내 상식으로는 그저 흑과 백의 논리처럼 확고한 것이었다. 그 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복수의 사랑을 선택한 저 남자가 결국은 지금 후회하고 있지 않은가. 슬며시 부엌에서 나왔다. 락씨의 시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림자가 부엌을 나오자마자 숨을 크게 쉰다.
to be continued.......